2006년 02월 21일
[연재] If I'm not in love with you (12)
그래..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않았던 건 다 내 잘못이다. 그렇게 형편 없게 되도록 내 안의 내 목소리를 무참히 묵살해버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잘못이다.
그래서 그가 어느 정도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건 시작부터가 내 잘못일뿐. 핑계라고 대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내 모순.
아저씨한테 몸을 판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 대해서 모든 걸 다 알고 말하는 것도 아닐 것이 분명하다.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로 치부한다고 해도 틀리는 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동안 아저씨가 견고하게 닫아준 내 껍질이 그의 말 한 마디로 산산조각 났다. 아저씨가 그냥 덮어주었던 내 과실이 다시 세상 앞에 발가벗겨져 드러났다. 전부 부인할 수 없는 내 잘못으로, 처음부터 스스로 거부하지 않은 업보로, 이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둔 나의 무심함으로.
그렇다면 나랑 섹스할 때 그는..
내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처절하고 비참한 가정들만 머릿속을 채워 간다.
섹스파트너가 되자고 한 것도 내가 능숙해서, 그런 내 몸이 탐나서였을까.
예뻤다고. 예전에 예뻤던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즐긴 것뿐이었을까.
친구가 되자고 하면 내가 좀 덜 불쌍해질 거라고, 그렇게 동정해준 것이었을까.
이제는 더 확실히 나를 예쁘고 테크닉 좋은 섹스토이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벽에 주르륵 기대어 앉아서 떨어진 눈물이 옷에 흡수되어 번진다.
그렇다면 나는 그의 생각대로 더 열심히 잘 대줘야 하나..
아니, 몸 팔았던 애는 이제 필요 없다고 하려나..
돈 때문에 몸까지 팔았다고, 아니 쾌락에 눈이 뒤집혀서 몸까지 파는 놈이라고 차디찬 눈으로 봐줄까..
아니, 봐주지도 않으려나..
이 집이 화대라는 거지..
섹스의 대가로 받은 집.
그는 어떻게 다른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고 나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저씨랑 나는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그렇게는 전혀 생각해봐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내가 형편 없어 보였던 걸까.
혹시.. 정말 그런가..?
이 집은 내가 아저씨와 섹스해줘서 받은 집인 걸까..?
사실, 내가 뭐라고 아저씨한테 이런 집을 받지? 그냥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 어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도 없이 그냥 말해버리면 그만인, 언제든 부인해버리면 그만인, 누구든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사랑이라는 그런 부실한 이유로.
그래, 값싼 자기합리화. 사실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을 텐데.
아저씨가 괜찮다고 해서 나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버려서..
그래서 정말 그런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인가보다.
아저씨, 그럼 나 아저씨한테 몸 팔았던 거 맞는 걸까요?
그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가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만 같아요. 그 전에는 아저씨가 아니라고 그래줘서 나도 아닌 줄 알았는데, 지금 그의 말을 듣고나니까 나는 틀렸고, 바보 같고, 더럽고, 그가 하는 말이 다 맞는 거 같은데 어떡해요?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제어하지 못한 행동들이 다 후회되고 노골적으로 그에게 요구하던 것들이 후회되서 견딜 수가 없는데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사람 눈에 그 따위로 쉽고, 싸구려로 보이는 내가 정말 저주스러운데요, 아저씨..
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요?
눈이 아파서 잘 떠지지 않는다. 눈에 찬 수건이 닿아 있는데 이건 누가 해준 걸까.
부스럭 움직이자 누군가가 재빨리 손을 잡으면서 말을 걸었다.
"깼니?"
침대 한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누군가가 앉는 것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체온이 다가온 것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보다, 가까이인 것을 알고 듣는데도 먼 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 같이 막연한 음성만이 귓가에 부딪쳐 들어온다. 너무나 막연해서 누군지도 알 수가 없다.
누가 나한테 이렇게 잘 해주는 걸까. 나는 그냥 사는 게 힘들다는 이유로, 아니 그저 남자가 좋아서 몸까지 팔아가며 산 사람이라 지금껏 이런 대접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고, 받을 자격도 없는데.
"의원실 갔는데, 너 전화도 없이 출근 안 했다고 그래서.. 전화 해봐도 받지도 않고. 걱정 돼서 와봤어. 괜찮니?"
침대에 누운 기억도 없는데 이것도 이 사람이 해준 건가. 그저 바닥에 주저 앉아 돌이킬 수도 없는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울었던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은 전혀 모르겠다.
"너 탈진한 것 같은데.. 하루만에 혈색도 너무 나빠지고.."
누구야? 누구예요?
만약에..
그.. 라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나 가고 나서 무슨 일 있었어?"
아저씨구나.
"나 나갈 때는 분위기 좋기만 하더니.. 나 때문에 그런 거야, 혹시?"
아저씨가 몸을 숙여 수건을 치우고 눈을 마주쳐 왔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었어. 한동안은 생전 울지도 않던 애가.. 방긋방긋 잘만 웃더니.. 웃어서 사람 혼 쏙 빠지게 하던 녀석이 왜 울고 그래.."
예전에 아저씨를 밀어내고 나서 떨던 나를 달랠 때처럼 아저씨의 따뜻한 입술이 내 이마에 닿는다. 이마, 다시 감아버린 눈꺼풀 위, 코끝, 뺨, 턱밑, 턱, 아랫입술, 윗입술을 차례대로 데워준 아저씨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내 입술을 머금는다.
아저씨의 위로가 눈물겨웠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나를 위로하기 위한 아저씨의 행동이 애처로웠다. 아저씨가 나를 위해 애써주는 것이 미안했다.
"울지 마, 민규야. 옛날에 그렇게 울었으면서도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니..? 난 네가 정말로 행복하길 바래.. 왜 그래.. 뭐가 널 그렇게 괴롭게 하니.."
눈물이 흘렀던지 아저씨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아저씨.."
"응."
"나는 분명히.. 아저씨 사랑한 거 맞거든요..? 아저씨도 나 많이 사랑했었던 거 맞죠..?"
아저씨는 연신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앞머리를 넘겨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이 굳이 대답을 요구한 게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근데 그게 어떤 사람한테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고려해볼 대상도 아니라는 게.. 나는 이렇게 속상할 줄.. 몰랐어요.."
아저씨가 이불을 들춰 내 옆에 들어와 누워서 내 가슴에 안겼다. 아저씨는 예전에도 자주 이렇게 내게 안겼었다. 내 가슴에 파고드는 아저씨의 머리를 가만히 감싸 안자 아저씨가 고개를 묻은 채로 내 몸에 기운을 담아 넣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민규가 나한테는, 내 인생에는 제일 훌륭하고, 빛나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위대한 사람이야. 아직도 나를 떨리게 하는 단 한 사람이야."
아저씨가 떠날 때, 나는 많이 슬퍼했었다.
상실감으로 너무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아저씨가 돌아와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아저씨와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진 이후로 사랑하지 않은 거라고 억지로 생각해본 적도 없다.
예전에는 이렇게 아저씨를 품에 안고 있으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슴이 벅찼었는데..
"민규야.."
"네?"
"아직도 그래.. 나는.. 나한테는 아직도 민규가 그런 사람이야.."
"네.."
"미안했어."
".. 뭐가요..?"
"전에 떠났을 때.. 그 때는 내가 바보 같았어. 내가 널 사랑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었거든.. 바보 같이.."
".. 괜.. 찮아요.. 괜찮아요, 아저씨. 괜찮은 게 아니고 아저씨.. 나야말로 아저씨를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인 거예요..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저씨가 헤어지자고 했어도 그 때나 지금도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처음부터 워낙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인간이었다. 내가 내 분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밤 그는 내게 다시 한 번 내 주제를 일깨워준 것 같다.
"민규야.."
".. 네?"
"그 사람.. 많이 좋아하나보구나.."
"네?"
"그 사람 맞지?"
"뭐가요..?"
"내가 다시 돌아올 틈도 안 주고 네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사람."
"그런 사람 없어요, 아저씨.."
"아니, 민규야.. 네 안에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는데 나.."
누가 내 머릿속을 채웠든 어쨌든 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우리는 벌써 헤어졌던 사람들이니까.
"이제는 너 욕심 안 낼 테니까.. 가끔 이렇게 좀 안아줄래?"
전처럼 느낄 수 없는 충만함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저씨를 향한 마음의 빛깔이 달라져버린 것. 그래서 미안하지만 다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안아주는 것밖에 없다는 것.
"안아줄 수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아저씨. 사실은 나 아저씨한테 제일 고맙고 미안한데.."
미안해요..
내 삶에 처음 비친 빛이 아저씨였는데.
처음 나한테 따뜻한 손과 사랑을 건넨 것도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그냥 괴롭기만 해요, 아저씨.
아프기만 해요, 아저씨.
아주 간단한 무엇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을 만큼 속상하기만 해요.
꽉 막힌 것처럼 목이 자꾸만 메기만 하는데..
미안해요.
안아줄 수는 있지만 아저씨를 다시 사랑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나 지금 너무 아프거든요..
이기적이지만 내가 아픈 것밖에 모를 만큼 아파요.
다시 그를 만나기 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듯이 내 주변은 평온하기만 하다. 일이 바쁜 것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고, 이런 저런 행사며, 옆 의원실 업무 지원도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그를 만난 것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그 바에 가지 않은 지도 한참이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 날 이후로, 집에 있는 것이 힘들어서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아저씨네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것 정도. 집에 있으면 자꾸 그와 보냈던 일들, 그가 했던 말들과 내 생각이 뒤엉켜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와 대화하고 만나서 해야만 하는 일도 되도록 서면으로 처리하거나, 김 비서관에게 부탁하든지, 아니면 그도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아저씨네 호텔에 들어간 뒤로 아저씨는 내가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저녁 때 와인을 보내서 같이 마셔주기도 했고, 생각이 복잡해 도망 나온 주제에도 너무 생각이 많아서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내게 안겨서 잠들기도 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애인에서는 짤렸어도 아직 자신은 내 후견인이라며 너무 옛 애인 내치지 말라고 농담까지 했다. 미안하면서도 아저씨를 뿌리치지 않을 만큼 요즘의 나는 이기적이고 나약하다.
하지만 당의장 선거에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나를 괴롭히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밀쳐 두었던 생각의 진원이 된 사람을 안 보려 해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안 보려 하기는 커녕 눈으로 쫓을 테니까. 본다 해도, 만난다 해도,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나는 이유도 없이 그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주 비서관님!"
"아, 안녕하세요?"
윤 비서관. 성은 기억 나는데 이름이..
"안녕하셨어요?"
"네. 요새는 저 없어도 잘 굴러가나봐요?"
"아니에요. 곧 또 도와주셔야 될 것 같아요. 아직도 멀었어요, 저는."
예쁘장한 얼굴로 기분 좋게 웃는 윤 비서관은 내게 가끔 지원을 요청하는 의원실의 비서관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데 벌써 기혼자인데다가 집안이 어디 재벌이라던가 하는 얘기도 어디서 주워 들었었고, 일을 잘 하거나, 창의성이 있거나 한지는 잘 몰라도 곧 보좌관으로 승진할지도 모르며, 어쩌면 초고속 승진으로 다음 선거 때 공천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덧붙여 상관할 일은 아닌 안 좋은 소문들까지.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아는 얼굴이 보여서 인사라도 한 마디 붙여봐야겠어요."
"네.."
눈짓까지 해가며 인사를 마치고 계속 서 있느라 고생한 다리를 위해서 잠시 의자에 앉았다. 별생각 없이 이곳 저곳 눈길을 주고 있다가 조금 전에 인사한 윤 비서관이 누군가와 반갑게 대화하더니 나란이 앉는 모습이 보인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윤 비서관이 앉으면서 보이는 상대편의 얼굴이 보이고 말았다.
꽤나 오랜만인 것 같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에 아련하게 짓고 있는 미소까지 내 눈에 들어 오고 만다.
어떻게 윤 비서관과 아는 거지..?
예쁘장한 기혼자인 윤 비서관의 이름이 '윤정현'이라는 사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아 조금 전에는 당황스럽더니 어쩐 일인지 그리운 듯한 표정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떠올랐다.
# by | 2006/02/21 10:24 | =FlytotheSk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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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우리 밍이 완전 불쌍해졌어. 어뜩해. ㅠ_ㅠ (윤석이 미워!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