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6월 26일
[연재] 만화가 vs. 소설가 (7)
만화가 vs. 소설가
(7) D-14
"응, 응. 이번 건 그렇게 됐어. 응. 다른 선생님한테 연락해놓을게. 미안해. 그래, 다음에 또 연락할게. 응."
"여보세요. 응, 그래. 휴가는 잘 보냈고? 나야, 뭐. 아, 무슨 일이냐면, 이번 작업은 혼자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일본쪽 작업이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한테 연락해놓을 테니까, 이번 연재 끝나면 바로 복귀해. 응, 응. 건강하게 잘 지내. 연락 자주하고. 으응~"
세 번째 전화를 끊은 그는 거실 벽의 앉은뱅이 소파에 기대어 눕다시피 한 상태로 만화책을 읽던 나를 보며 살풋 웃더니 네 번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주민균데요. 뷘 샘 좀 바꿔주세요. 네."
전화를 바꾸는 중인지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입모양으로 '배고프지 않아?'하고 물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데 그가 다시 입모양으로 '잠깐만.'하는 통에 배고프다고 말하려고 반쯤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뷘 선생, 오랜만이야. 알았어, 미안, 미안. 아,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오늘 그의 홈패션은 아침부터 정장틱하다. 잘 다려진 짙은 회색 정장 바지에 노타이지만 흰 드레스 셔츠. 두어 개쯤 푸른 단추에 그가 좋아하는 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소매를 약간 걷은 상태였다. 카디건 아래로 약간 나온 셔츠 소매에는 보통 내가 보던 셔츠 단추가 아닌 뭔가 반짝 하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연재 늘린다며.. 몇 달만 우리 어시들 부탁해. 페이는 내가 줄게. 아니이.. 일본쪽 연재 하는데, 그냥 혼자 하는 게 편할 거 같고 그래서.. 응. 부탁해. 연락처 불러줄게. 010-XXXX-YYYY 김해영. 남자야. 응. 연락해서 영선 씨랑 정연 씨도 같이 오.. 응. 고마워. 나중에 한 번 쏠게. 어디, 어디? 아웃백?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봐아~"
무의식 중에 그를 또 빤히 쳐다 봤는지 전화를 끊은 그가 미간을 장난스럽게 찌푸리며 말한다.
"내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어? 왜 그렇게 웃으면서 쳐다 봐? 나 뚫으려고?"
장난스럽게 일그러지는 그의 다양한 표정이 귀여워서 쿡 웃었더니, '어쭈, 점점..' 하던 그가 의미심장하게 오른쪽 눈썹을 슬쩍 올리면서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배 안 고픈가봐? 나 혼자 밥 먹는다."
"또 간지럽혀지고 싶은가봐? 뭐, 나야 즐겁지만.."
"누가 잡혀준대? 흥!"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그를 뒤에서 와락 안아서 두 손목을 한 손에 몰아 쥐고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렇게 가는 손목은 아닌데 한 손에 잡히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멀지 않은 귓가에 약오르도록 말을 걸었다.
"안 잡힌다며?"
"뒤에서 공격하는 게 어딨어! 비겁해, 윤석 군!"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비틀면서도 간지럼 때문에 까르륵 웃는 그는 귀 뒤까지 빨개져 있었다. 뒤에서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은색 실목걸이나 작게 달랑거리는 은십자가 귀고리도 보였다. 슬슬 부엌쪽으로 걸으면서 간지럽히고, 도망가려는 승강이를 벌이다가 갑자기 그가 내 왼쪽발을 '아얏!' 소리 나게 밟았다. 순간 벗어난 그는 내 두 손목을 자기 두 손으로 꽉 모아 잡고 최후 통첩을 알린다.
"밥 줄 테니까 제발 그만해줘, 응? 나 간지러운 거 진짜 못 견딘단 말이야."
너무 시달려서 눈물까지 글썽글썽 맺힌 그를 보니, 이겼다는 생각, 미안하다는 생각, 다시 장난칠까 하는 생각, 울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 뭔지는 모르겠는데 흐뭇한 생각, 귀여운데 아예 울려볼까 같은 이상한 생각까지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저요! 저요!'했다. 생각들이 난리를 치는 동안 내 오른손은 통제를 벗어나 그의 글썽이는 눈물을 닦고 있었고, 입에서는 '이젠 안 그럴게.'라는 말이 미처 생각을 다 마치지도 못 한 채로 비죽 튀어나왔다.
"な、何。僕が女でもなくて.."
뭔가를 빠르게 말하면서 그가 돌아서자 멍해져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벌써 부엌으로 쏙 들어가버린 상태. 따라 들어갔더니 냉동실에서 뭔가를 꺼내는 그가 보였다. 뭔가 거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서있다가 시킬 게 있으면 부르겠지 하는 판단이 내려져서 홈바 밑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이따 마트 다녀와야겠다. 냉장고가 엄한 메뉴 빼고 비었네. 나 작업 시작했으니까 간편한 것들 잔뜩 사버려야지."
그의 냉장고는 한 마디로 대단했다. 일단 혼자 사는 남자가 문 두 개 달린 냉장고라는 점에서도 놀랐지만 그건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는 그의 설명으로 납득했다고 치더라도, 더 대단했던 것은 냉장고 안의 정리 상태가 살림만 하셨던 우리 엄마의 냉장고보다도 훨씬 끝내줬다는 것이었다. 밀폐용기에 일정하게 담겨있는 각종 반찬과 채소, 과일에 처음 열었을 때는 건드리기 미안할 정도였다.
"점심 먹고 마트 가자."
"응."
그가 주섬주섬 꺼내어 준비한 점심은 밥보다 채소가 더 많은 비빔밥이었다. 냉장고가 비었다면서 어디서 이렇게 많은 채소가 나온 건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숟가락으로 퍽퍽 비비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그가 '이리 줘봐.'한다.
"비빔밥 한 번 무지막지하게 비빈다. 거기 날치알 다 으깨지겠다. 젓가락으로 해야지."
아, 이 작고 빨간 것의 정체가 날치알이었구나.
젓가락으로 살살 비비는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 아까 소매 끝에서 반짝이던 것이 보였다. 저건 뭘까.
"그거 뭐야?"
"응?"
"그거. 소매에 있는.."
"아.. cuffs buttons."
미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저절로 확인되는 발음. 어쨌든 버튼이라는 걸 보면 단추 역할인가보다. 젓가락으로 꼼꼼하게 비비는 그의 소매를 다시 유심히 관찰하자, 그의 다른 액세서리들과 마찬가지로 은색인 새끼 손톱 길이 정도 되는 얇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나 정장 액세서리를 좋아해서.. 모으는 거야. 정장 입는 거 좋아해서.. 자, 이제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응. 戴きます。"
설거지를 다 하고 나오자 코타츠에 무릎 꿇고 앉아서 수첩에 뭘 살지 고민하면서 적는 그가 보였다. 이를 닦기 위해 그냥 욕실로 가려는데 그가 부르는 말에 돌아보니 볼펜 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른 그가 눈을 동그랗게 올려 뜨고 물었다.
"윤석 군이 먹고 싶은 거나 좋아하는 거 말해봐."
그 모습이 어른옷을 입은 아이같아서 씩 웃으면서 그에게 또 한 마디 들을 것이 뻔한 대답을 해주었다.
"나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뭔가 확실하게 말해봐! 기호에 대해서! 좋아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맨날 그래, 윤석 군은!"
약간 짜증을 내는 것인데도 전혀 거슬리지 않는 이유라면 그가 정말로 짜증나서가 아니라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어른옷 입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웃지 마! 쳇.."
큭큭- 하고 웃음 소리를 죽이며 이를 다 닦고 나오자, 그는 뭔가를 열심히 적더니 나를 흘끔 째려보면서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먹어야돼!"
"응."
"20분이면 나올 수 있지?"
"응."
"20분 후에 봐. 먼저 나오는 사람이 시동 걸기."
"알았어."
그는 지금 그대로 나가도 될 것 같은 차림이었는데도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 건지, 아니면 나더러 준비하라고 일부러 시간을 주는 건지 20분의 말미를 주었다. 대충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마침 그도 방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동시라는 게 왠지 우스워서 서로 발견하자마자 큭큭대고 있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나를 본 그가 갑자기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뭘 빠뜨렸나 싶어서 차키를 들고 나가려는데 방 안에서 그가 '윤석 군, 나가지 말고 있어봐!' 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깐 서있었다. 다시 조금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현관에 내려가 있어서 조금 낮아진 내 두 뺨과 이마, 턱에 끈적이지 않는 로션을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너무 아저씨 같지도,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은 썩 상쾌한 향의 로션이었다.
"3월이어도 아직 춥고 건조해. 그냥 다니면 얼굴 다 터버린단 말이야. 가자."
"어.. 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같아서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한 채 차키를 들고 나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옆에 와서 앉은 그는 가죽으로 된 정사각의 아무 무늬도 없는 책 한 권 크기의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안 가? 내가 운전할까?"
"아.. 아니."
대체 정신은 어디 용왕한테 꺼내주고 온 건지 요사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자학하며 운전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입은 정장 탓인지 보조석의 그가 다리를 꼰 채 창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정말로 말쑥해서 굉장히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는 그에게서 아까 나에게 발라준 로션과 같은 향이 좀 더 진하게 나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사?"
"응. 한 2주 마트 못 올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싸잖아. 냉장고에 넣으면 상하지도 않고."
"어.."
"다 윤석 군이 대답을 안 해서 그런 거야. 오늘 저녁까지만 밥 잘 먹는 건줄 알아."
"네, 네."
특정 식품들만 정말 무지막지한 양으로 사버린 그는 주차장까지 카트를 밀던 나보다 반 발짝쯤 앞서 걷고 있었다. 앞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또 다시 그 스킨 냄새가 약하게 실려왔다. 혹시 나한테서 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아! 근데 저기 말이야.. 윤석 군 하숙비는 얼마 낼 거야?"
"응?"
"음..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문제를 막상 실질적으로 생각하려니 깔끔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런 문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함께 산 지 채 일 주일도 안 되었는데.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나 사실 아무 것도 모르겠어."
곤란한 생각 그대로를 말하자, 그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뒷좌석에 쇼핑한 것들을 싣는 동안 조수석에 먼저 앉았던 그는 내가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고, 집에 다다를 때까지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듯 보였다. 그는 심각한 마당에 할 소린 아니지만 그의 입술을 앙 다문 채 이쪽 저쪽 허공을 째려보는 표정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윤석 군! 그러면.. 나 마감할 동안 집안일 아르바이트 해. 어차피 오늘 산 메뉴로는 요리할 일도 없고 차리고 설거지만 잘 하면 되잖아. 목요일에는 도우미 아주머니 청소하실 때 도우면 되고.. 사서함 정리도 하고.. 할 일도 많네. 어때?"
"아, 뭐..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별 아이디어가 없어서 말이야."
"음..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군. 나 저녁 먹기 전까지 작업할 거니까 윤석 군도 생각해봐."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와 냉장고 정리를 하는 동안 그가 하는 얘기를 잠자코 듣다가 솔직한 대답을 하자 그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더 말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그가 터무니 없는 쇼핑 결과물들을 냉장고에 진열하는 것을 도왔다.
"나 내려갈게. 윤석 군도 내려오려면 내려오고.."
"응."
외출복이라고 해서 불편할 것도 없는 옷이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입던 아무 무늬도 없는 긴팔 회색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오전에 비스듬이 누워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그의 만화책을 집어 들고 앉았다. 그의 만화책은 어렸을 때 읽던 만화책들처럼 그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게 아니라 여유 있는 공간에 진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다락에 올라가서 길쭉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가 또 하는 일 없이 잠들어버릴까 싶어서 엎드려서 그가 선물해준 수첩을 폈다. 전에 펴봤을 때는 스스륵 넘겨본 거라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제대로 써보려고 첫 장을 펴자 그의 그림과 글이 있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은 운전하는 내 옆 모습이었고, 써있던 글은 엉뚱하게도 내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생경한 일본어였다. 가나를 읽는 법은 고등학교 때 배웠었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가타카나는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한자는 지극히 기초적인 한자 밖에 몰랐다. 물론 한자를 따로 읽을 수는 있었지만 일본어로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하고 그냥 아는 글자라도 읽어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들여다 봤다.
「何をたより
よりかかり生きてゆくちっちゃい心で
せめて胸の灯火は消さないように步けたのなら
君を照らせるのに 」
셋째줄부터는 전혀 모르겠어서 왠 사서 고생인가 싶어 그냥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줄만 쳐진 훤한 수첩. 일단 날짜를 적었다. '05-03-02' 그러고보니 어제가 삼일절이었다. 뭘 했길래 전혀 몰랐을까. 학교 다닐 땐 개강 하루 전이라 마지막으로 방학을 불태우자며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했을 날인데, 역시 졸업한 백수에게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흘렀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뭘 쓸까..
뭘 쓰.. 나..
대체 뭘 적어야 할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건만 난 왠지 모르게 꼭 이 두 번째 장을 지금 써야된다는 의무감에 불타올랐다.
「그는,
만화가다. 그것도 엄청 잘 나가는.
그는 밥도 잘 한다. 자취 오래 했다고 하더니 정말 못 하는 요리가 없는 것 같다.
그는 코발트인가 뭔가 하는 짙은 남색을 좋아한다. 집안이 온통 그 색깔이다.
그리고 그는 로션 냄새가 좋다. 비싼 건가..
손은 그렇게 예쁜 것 같진 않다. 로션 발라줄 때 보니까 예쁘진 않았다.
하긴 뭐, 만화가라서 손쓸 일이 많을 테니까..
그의 그림은 수채화 같다. 사람들도 실제 사람이랑 비슷하다.
장르도 엄청 다양했다. 역사, 연애, 명랑, 무협, 판타지, 추리 등등..
그리고..
그는..
간지럼에 약하다.」
간지럼에 약하다, 고 쓰자마자 요며칠 간지럼 때문에 나한테 엄청 당한 그가 쫙 스쳐 생각난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는데 그는 간지럼에 약해서, 특히 옆구리 찔림에는 완전 속수무책이다. 그러더니 막판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 부탁까지 했다. 이제 안 하겠다, 고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린관계로 다시 그 재미를 느낄 수 없다니 조금 아쉬운 듯도. 문득 어제 저녁 먹을 때 오늘부터는 그림 그릴 거라고 말한 그가 생각나서 작업실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굳히고 엎드렸던 몸을 찌뿌둥하게 일으키는 순간 지난 며칠 이 공간에 여유있게 머물지 않은 관계로 충전기에 꽂힌 채 방치당한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뭐 중요한 거라도 있을까 해서 확인해보니 060 광고 전화 몇 통과 광고 문자를 빼고는 특별할 것 없는 친구 녀석들의 문자였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 전화한 놈이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 야, 이놈아!
= 아, 시끄러워.
대뜸 소리부터 치는 녀석 때문에 귀에서 전화기를 냉큼 떼어냈다.
= 야,야. 너 왜 아무 연락이 없어?
= 뭘. 내가 뭐 너한테 보고하고 다녀야 되냐?
= 너 이 자식. 빨리 불어. 어떻게 됐어?
= 뭐가.
= 만화가한테 찾아들어가서 눌러 앉을 거라며!
= 이 자식, 말하는 품새 봐라. 내가 언제 눌러 앉을 거라고 했어. 문하생 비슷하게 간다고 했지.
= 어쨌든 그게 그거 아니야. 어떻게 됐어?
= 뭐, 두 번 퇴짜 맞고 세 번째 사람네 집엔 들어왔어.
= 오울~ 능력 있네, 황윤석이. 예쁘냐? 예쁘냐?
= 야.
= 왜?
= 어째서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예쁘냐고 묻는 저의가 괘씸해서 좀 깔고 말했더니 오히려 저쪽에서 더 짜증을 낸다.
= 야, 너 그럼 그 만화가가 남자란 말이냐?
= 그렇다면?
= 너 바보냐. 왜 남자 집에 기어 들어가? 만화가 중에 천지빼까리가 여자 아냐!
= 웃기는 놈 보게. 남자건 여자건 무슨 상관이래?
= 야, 야. 작품도 다 음양의 조화가 필요한 거라고. 네가 이 높으신 엉아의 뜻을 어찌 알겠냐.
= 야, 이 사상 불순한 놈아. 너나 잘해, 너나. 지도 청년 실업 50만 중에 포함되는 놈 주제에.
= 글쓰겠다고 남자 집에 기어 들어간 놈보다 낫네요.
= 끊자, 화상.
= 야, 그러믄 혹시 싸인이라도, 좀.
= 놀고 있네. 끊는다, 김태형.
= 야, 야!
하여간 실 없는 놈. 전화를 끊고 이번엔 충전기 아닌 주머니에 넣고 다락에서 내려왔다. 작업실로 내려가는 뒷문을 열었다가 뭐 마실 거라도 가지고 갈까 싶어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팩에 든 포도쥬스를 꺼내 컵에 따르고 있는데 뒷문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올라온 모양이다. 부엌에 들어온 그가 날 보더니 '헙!'하는 소리와 함께 대단히 놀랐다. 대단히 놀란 그는 심지어 바닥에 주저 앉았다. 놀란 그의 소리와 행동 덕분에 오히려 놀란 내가 그에게 얼른 다가가 일으키려 하자, 그는 나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일으키려 댄 내 손에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저기.. 민규야?"
"아.. 미안."
"괜찮은 거야?"
"아.. 응. 나 때문에 놀랐지? 윤석 군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나도 참.."
드디어 평정을 찾은 건지 일어나라고 내민 손을 잡고 그가 일어났다.
"저녁 때 먹을 참치 해동시키려고 올라왔는데, 윤석 군은? 배고파? 뭐 간식 만들어 먹을까?"
아직 긴장 상태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닌지 그는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며 말도 정신 없이 늘어놓았다. 이러면 괜히 미안한 느낌인데..
"아니, 그냥 작업실 내려가려는데 마실 거나 가져가볼까 하고."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굉장히 고맙네, 이거. 잘 마실게."
따라 놓은 쥬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는 듯 한숨을 휴- 하고 쉬더니 말을 이었다.
"같이 내려갈래? 근데 주의사항이 있어. 그림은 비밀이야!"
"알았어."
"가자."
그는 포도쥬스가 남은 컵을 그대로 들고 앞장을 섰다. 작업실로 내려가자 오늘은 그가-건축가들이 도면을 놓고 그릴 것 같이 생긴-작업대에 앉아서 안경을 꼈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수첩 앞에 있던 그림과 글에 대해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근데.."
"이름."
"응?"
"응. 이름."
"아, 민규야. 그 수첩 앞에 써있는 거 무슨 뜻이야?"
"아, 이제야 봤어? 어지간 하네. 별 얘기 아니야."
"뭔데?"
"그냥 노래 가사."
"무슨 뜻인데?"
"그냥 뭐 열심히 하라는 뜻이야."
연필을 쥔 그가 그다지 성의 있게 대답해주지 않자 살짝 기분이 상하는 것도 같았지만 작업 중인 그를 더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서 그를 보고 있으려니 표정이 좀 이상하다.
"그.. 림은 별로였어?"
"응?"
"아니, 그림에 대한 얘긴 없길래.. 혹시 허락도 안 맡고 그려서 싫었나 하고.."
일하면서 신경 별로 안 쓰는 척 하면서 묻고 있지만, 사실 그의 얼굴은 '나 꽤 신경쓰입니다.'였다.
"그럴 리가. 난 그냥 싫었다는 게 아니고 별 생각이 없었.. 그러니까 그림이 어쨌다는 게 아니고, 싫을 만한 게 없었단 얘기야. 고마웠어."
"응."
이유 없이 괜히 흥분해서는 또 이상한 말만 잔뜩 한 것 같아서 내 기분이 되려 언짢으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은 풀린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대화도 없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표정을 찡긋찡긋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안경을 거친 그의 눈이 시선을 겹쳐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끝. 저녁 먹자, 윤석 군."
문득 시계를 보니 저녁 먹기엔 약간 이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른 시간도 아니어서 그를 따라 올라갔다. 부엌에 간 그는 그의 카디건 색깔과 똑같은 앞치마를 또 두르고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했다. 오늘 저녁은 설거지만 부탁한다며 홈바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그는 재료를 준비해서는 홈바 안 쪽의 조금 더 높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식단이 빈약하니까 미리 영양 보충하자고. 집에 있던 참치로 만든 주민규 표 초밥입니다."
홈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그가 시선이 좀 더 높았지만-그가 만들어주는 초밥을 먹는 방법까지 배우면서 먹었다.
"너도 먹어야지."
"응. 지금부터 먹을 거야. 이거 누가 만들었는지 되게 맛있다."
오물오물 씹으며 한 손은 허리에 손을 짚은 그가 나머지 한 손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빈 말이 아니라 진짜로 꽤-초밥 맛은 잘 모르지만-맛있었고 홈바 위의 둥근 갓을 쓴 전등 불빛에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일부터는 내가 깨울 때 딱 일어나주세요. 씻을 동안은 아침 준비 부탁합니다."
"응. 수저하고 그릇 정도 더 꺼내면 되는 건데 뭐."
"걱정 안 할게. 근데 이거 진짜 맛있지 않아? 왜 감상이 없냐?"
"아, 맛있어. 진짜."
"어우, 재미없어. 생각 없을 때의 반만큼만 재밌어봐라."
"응?"
"아니야, 아니야. 많이 먹으라고."
"응."
이상해, 이상해.
분명 뭐라고 했는데..
또 무뇌 상태야.
(7) D-14
"응, 응. 이번 건 그렇게 됐어. 응. 다른 선생님한테 연락해놓을게. 미안해. 그래, 다음에 또 연락할게. 응."
"여보세요. 응, 그래. 휴가는 잘 보냈고? 나야, 뭐. 아, 무슨 일이냐면, 이번 작업은 혼자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일본쪽 작업이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한테 연락해놓을 테니까, 이번 연재 끝나면 바로 복귀해. 응, 응. 건강하게 잘 지내. 연락 자주하고. 으응~"
세 번째 전화를 끊은 그는 거실 벽의 앉은뱅이 소파에 기대어 눕다시피 한 상태로 만화책을 읽던 나를 보며 살풋 웃더니 네 번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주민균데요. 뷘 샘 좀 바꿔주세요. 네."
전화를 바꾸는 중인지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입모양으로 '배고프지 않아?'하고 물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데 그가 다시 입모양으로 '잠깐만.'하는 통에 배고프다고 말하려고 반쯤 열었던 입을 다물었다.
"뷘 선생, 오랜만이야. 알았어, 미안, 미안. 아,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오늘 그의 홈패션은 아침부터 정장틱하다. 잘 다려진 짙은 회색 정장 바지에 노타이지만 흰 드레스 셔츠. 두어 개쯤 푸른 단추에 그가 좋아하는 색의 카디건을 걸치고 소매를 약간 걷은 상태였다. 카디건 아래로 약간 나온 셔츠 소매에는 보통 내가 보던 셔츠 단추가 아닌 뭔가 반짝 하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연재 늘린다며.. 몇 달만 우리 어시들 부탁해. 페이는 내가 줄게. 아니이.. 일본쪽 연재 하는데, 그냥 혼자 하는 게 편할 거 같고 그래서.. 응. 부탁해. 연락처 불러줄게. 010-XXXX-YYYY 김해영. 남자야. 응. 연락해서 영선 씨랑 정연 씨도 같이 오.. 응. 고마워. 나중에 한 번 쏠게. 어디, 어디? 아웃백?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봐아~"
무의식 중에 그를 또 빤히 쳐다 봤는지 전화를 끊은 그가 미간을 장난스럽게 찌푸리며 말한다.
"내가 그렇게 웃기게 생겼어? 왜 그렇게 웃으면서 쳐다 봐? 나 뚫으려고?"
장난스럽게 일그러지는 그의 다양한 표정이 귀여워서 쿡 웃었더니, '어쭈, 점점..' 하던 그가 의미심장하게 오른쪽 눈썹을 슬쩍 올리면서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배 안 고픈가봐? 나 혼자 밥 먹는다."
"또 간지럽혀지고 싶은가봐? 뭐, 나야 즐겁지만.."
"누가 잡혀준대? 흥!"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그를 뒤에서 와락 안아서 두 손목을 한 손에 몰아 쥐고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렇게 가는 손목은 아닌데 한 손에 잡히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멀지 않은 귓가에 약오르도록 말을 걸었다.
"안 잡힌다며?"
"뒤에서 공격하는 게 어딨어! 비겁해, 윤석 군!"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비틀면서도 간지럼 때문에 까르륵 웃는 그는 귀 뒤까지 빨개져 있었다. 뒤에서 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던 은색 실목걸이나 작게 달랑거리는 은십자가 귀고리도 보였다. 슬슬 부엌쪽으로 걸으면서 간지럽히고, 도망가려는 승강이를 벌이다가 갑자기 그가 내 왼쪽발을 '아얏!' 소리 나게 밟았다. 순간 벗어난 그는 내 두 손목을 자기 두 손으로 꽉 모아 잡고 최후 통첩을 알린다.
"밥 줄 테니까 제발 그만해줘, 응? 나 간지러운 거 진짜 못 견딘단 말이야."
너무 시달려서 눈물까지 글썽글썽 맺힌 그를 보니, 이겼다는 생각, 미안하다는 생각, 다시 장난칠까 하는 생각, 울지는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 뭔지는 모르겠는데 흐뭇한 생각, 귀여운데 아예 울려볼까 같은 이상한 생각까지 오만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저요! 저요!'했다. 생각들이 난리를 치는 동안 내 오른손은 통제를 벗어나 그의 글썽이는 눈물을 닦고 있었고, 입에서는 '이젠 안 그럴게.'라는 말이 미처 생각을 다 마치지도 못 한 채로 비죽 튀어나왔다.
"な、何。僕が女でもなくて.."
뭔가를 빠르게 말하면서 그가 돌아서자 멍해져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벌써 부엌으로 쏙 들어가버린 상태. 따라 들어갔더니 냉동실에서 뭔가를 꺼내는 그가 보였다. 뭔가 거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서있다가 시킬 게 있으면 부르겠지 하는 판단이 내려져서 홈바 밑의 의자를 빼어 앉았다.
"이따 마트 다녀와야겠다. 냉장고가 엄한 메뉴 빼고 비었네. 나 작업 시작했으니까 간편한 것들 잔뜩 사버려야지."
그의 냉장고는 한 마디로 대단했다. 일단 혼자 사는 남자가 문 두 개 달린 냉장고라는 점에서도 놀랐지만 그건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는 그의 설명으로 납득했다고 치더라도, 더 대단했던 것은 냉장고 안의 정리 상태가 살림만 하셨던 우리 엄마의 냉장고보다도 훨씬 끝내줬다는 것이었다. 밀폐용기에 일정하게 담겨있는 각종 반찬과 채소, 과일에 처음 열었을 때는 건드리기 미안할 정도였다.
"점심 먹고 마트 가자."
"응."
그가 주섬주섬 꺼내어 준비한 점심은 밥보다 채소가 더 많은 비빔밥이었다. 냉장고가 비었다면서 어디서 이렇게 많은 채소가 나온 건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숟가락으로 퍽퍽 비비고 있는 나를 보더니 그가 '이리 줘봐.'한다.
"비빔밥 한 번 무지막지하게 비빈다. 거기 날치알 다 으깨지겠다. 젓가락으로 해야지."
아, 이 작고 빨간 것의 정체가 날치알이었구나.
젓가락으로 살살 비비는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 아까 소매 끝에서 반짝이던 것이 보였다. 저건 뭘까.
"그거 뭐야?"
"응?"
"그거. 소매에 있는.."
"아.. cuffs buttons."
미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저절로 확인되는 발음. 어쨌든 버튼이라는 걸 보면 단추 역할인가보다. 젓가락으로 꼼꼼하게 비비는 그의 소매를 다시 유심히 관찰하자, 그의 다른 액세서리들과 마찬가지로 은색인 새끼 손톱 길이 정도 되는 얇은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나 정장 액세서리를 좋아해서.. 모으는 거야. 정장 입는 거 좋아해서.. 자, 이제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응. 戴きます。"
설거지를 다 하고 나오자 코타츠에 무릎 꿇고 앉아서 수첩에 뭘 살지 고민하면서 적는 그가 보였다. 이를 닦기 위해 그냥 욕실로 가려는데 그가 부르는 말에 돌아보니 볼펜 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른 그가 눈을 동그랗게 올려 뜨고 물었다.
"윤석 군이 먹고 싶은 거나 좋아하는 거 말해봐."
그 모습이 어른옷을 입은 아이같아서 씩 웃으면서 그에게 또 한 마디 들을 것이 뻔한 대답을 해주었다.
"나 아무거나 다 잘 먹는데.."
"뭔가 확실하게 말해봐! 기호에 대해서! 좋아하는 게 있을 거 아냐! 맨날 그래, 윤석 군은!"
약간 짜증을 내는 것인데도 전혀 거슬리지 않는 이유라면 그가 정말로 짜증나서가 아니라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어른옷 입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웃지 마! 쳇.."
큭큭- 하고 웃음 소리를 죽이며 이를 다 닦고 나오자, 그는 뭔가를 열심히 적더니 나를 흘끔 째려보면서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잔말 말고 주는 대로 먹어야돼!"
"응."
"20분이면 나올 수 있지?"
"응."
"20분 후에 봐. 먼저 나오는 사람이 시동 걸기."
"알았어."
그는 지금 그대로 나가도 될 것 같은 차림이었는데도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 건지, 아니면 나더러 준비하라고 일부러 시간을 주는 건지 20분의 말미를 주었다. 대충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마침 그도 방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동시라는 게 왠지 우스워서 서로 발견하자마자 큭큭대고 있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나를 본 그가 갑자기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뭘 빠뜨렸나 싶어서 차키를 들고 나가려는데 방 안에서 그가 '윤석 군, 나가지 말고 있어봐!' 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깐 서있었다. 다시 조금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그는 현관에 내려가 있어서 조금 낮아진 내 두 뺨과 이마, 턱에 끈적이지 않는 로션을 꼼꼼하게 발라주었다. 너무 아저씨 같지도,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은 썩 상쾌한 향의 로션이었다.
"3월이어도 아직 춥고 건조해. 그냥 다니면 얼굴 다 터버린단 말이야. 가자."
"어.. 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같아서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한 채 차키를 들고 나와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았다. 옆에 와서 앉은 그는 가죽으로 된 정사각의 아무 무늬도 없는 책 한 권 크기의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다.
"안 가? 내가 운전할까?"
"아.. 아니."
대체 정신은 어디 용왕한테 꺼내주고 온 건지 요사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에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자학하며 운전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입은 정장 탓인지 보조석의 그가 다리를 꼰 채 창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정말로 말쑥해서 굉장히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는 그에게서 아까 나에게 발라준 로션과 같은 향이 좀 더 진하게 나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사?"
"응. 한 2주 마트 못 올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싸잖아. 냉장고에 넣으면 상하지도 않고."
"어.."
"다 윤석 군이 대답을 안 해서 그런 거야. 오늘 저녁까지만 밥 잘 먹는 건줄 알아."
"네, 네."
특정 식품들만 정말 무지막지한 양으로 사버린 그는 주차장까지 카트를 밀던 나보다 반 발짝쯤 앞서 걷고 있었다. 앞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또 다시 그 스킨 냄새가 약하게 실려왔다. 혹시 나한테서 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아! 근데 저기 말이야.. 윤석 군 하숙비는 얼마 낼 거야?"
"응?"
"음..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문제를 막상 실질적으로 생각하려니 깔끔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런 문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함께 산 지 채 일 주일도 안 되었는데.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나 사실 아무 것도 모르겠어."
곤란한 생각 그대로를 말하자, 그도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뒷좌석에 쇼핑한 것들을 싣는 동안 조수석에 먼저 앉았던 그는 내가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고, 집에 다다를 때까지 시종일관 같은 표정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듯 보였다. 그는 심각한 마당에 할 소린 아니지만 그의 입술을 앙 다문 채 이쪽 저쪽 허공을 째려보는 표정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윤석 군! 그러면.. 나 마감할 동안 집안일 아르바이트 해. 어차피 오늘 산 메뉴로는 요리할 일도 없고 차리고 설거지만 잘 하면 되잖아. 목요일에는 도우미 아주머니 청소하실 때 도우면 되고.. 사서함 정리도 하고.. 할 일도 많네. 어때?"
"아, 뭐..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별 아이디어가 없어서 말이야."
"음..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군. 나 저녁 먹기 전까지 작업할 거니까 윤석 군도 생각해봐."
차에서 내려 집에 들어와 냉장고 정리를 하는 동안 그가 하는 얘기를 잠자코 듣다가 솔직한 대답을 하자 그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뭔가를 더 말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그가 터무니 없는 쇼핑 결과물들을 냉장고에 진열하는 것을 도왔다.
"나 내려갈게. 윤석 군도 내려오려면 내려오고.."
"응."
외출복이라고 해서 불편할 것도 없는 옷이었지만 그래도 집에서 입던 아무 무늬도 없는 긴팔 회색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오전에 비스듬이 누워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그의 만화책을 집어 들고 앉았다. 그의 만화책은 어렸을 때 읽던 만화책들처럼 그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게 아니라 여유 있는 공간에 진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다락에 올라가서 길쭉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가 또 하는 일 없이 잠들어버릴까 싶어서 엎드려서 그가 선물해준 수첩을 폈다. 전에 펴봤을 때는 스스륵 넘겨본 거라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제대로 써보려고 첫 장을 펴자 그의 그림과 글이 있었다. 연필로 그린 그림은 운전하는 내 옆 모습이었고, 써있던 글은 엉뚱하게도 내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생경한 일본어였다. 가나를 읽는 법은 고등학교 때 배웠었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가타카나는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고, 한자는 지극히 기초적인 한자 밖에 몰랐다. 물론 한자를 따로 읽을 수는 있었지만 일본어로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하고 그냥 아는 글자라도 읽어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들여다 봤다.
「何をたより
よりかかり生きてゆくちっちゃい心で
せめて胸の灯火は消さないように步けたのなら
君を照らせるのに 」
셋째줄부터는 전혀 모르겠어서 왠 사서 고생인가 싶어 그냥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줄만 쳐진 훤한 수첩. 일단 날짜를 적었다. '05-03-02' 그러고보니 어제가 삼일절이었다. 뭘 했길래 전혀 몰랐을까. 학교 다닐 땐 개강 하루 전이라 마지막으로 방학을 불태우자며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했을 날인데, 역시 졸업한 백수에게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흘렀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뭘 쓸까..
뭘 쓰.. 나..
대체 뭘 적어야 할까..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건만 난 왠지 모르게 꼭 이 두 번째 장을 지금 써야된다는 의무감에 불타올랐다.
「그는,
만화가다. 그것도 엄청 잘 나가는.
그는 밥도 잘 한다. 자취 오래 했다고 하더니 정말 못 하는 요리가 없는 것 같다.
그는 코발트인가 뭔가 하는 짙은 남색을 좋아한다. 집안이 온통 그 색깔이다.
그리고 그는 로션 냄새가 좋다. 비싼 건가..
손은 그렇게 예쁜 것 같진 않다. 로션 발라줄 때 보니까 예쁘진 않았다.
하긴 뭐, 만화가라서 손쓸 일이 많을 테니까..
그의 그림은 수채화 같다. 사람들도 실제 사람이랑 비슷하다.
장르도 엄청 다양했다. 역사, 연애, 명랑, 무협, 판타지, 추리 등등..
그리고..
그는..
간지럼에 약하다.」
간지럼에 약하다, 고 쓰자마자 요며칠 간지럼 때문에 나한테 엄청 당한 그가 쫙 스쳐 생각난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었는데 그는 간지럼에 약해서, 특히 옆구리 찔림에는 완전 속수무책이다. 그러더니 막판엔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 부탁까지 했다. 이제 안 하겠다, 고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린관계로 다시 그 재미를 느낄 수 없다니 조금 아쉬운 듯도. 문득 어제 저녁 먹을 때 오늘부터는 그림 그릴 거라고 말한 그가 생각나서 작업실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굳히고 엎드렸던 몸을 찌뿌둥하게 일으키는 순간 지난 며칠 이 공간에 여유있게 머물지 않은 관계로 충전기에 꽂힌 채 방치당한 전화기가 눈에 띄었다. 뭐 중요한 거라도 있을까 해서 확인해보니 060 광고 전화 몇 통과 광고 문자를 빼고는 특별할 것 없는 친구 녀석들의 문자였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 전화한 놈이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걸었다.
= 야, 이놈아!
= 아, 시끄러워.
대뜸 소리부터 치는 녀석 때문에 귀에서 전화기를 냉큼 떼어냈다.
= 야,야. 너 왜 아무 연락이 없어?
= 뭘. 내가 뭐 너한테 보고하고 다녀야 되냐?
= 너 이 자식. 빨리 불어. 어떻게 됐어?
= 뭐가.
= 만화가한테 찾아들어가서 눌러 앉을 거라며!
= 이 자식, 말하는 품새 봐라. 내가 언제 눌러 앉을 거라고 했어. 문하생 비슷하게 간다고 했지.
= 어쨌든 그게 그거 아니야. 어떻게 됐어?
= 뭐, 두 번 퇴짜 맞고 세 번째 사람네 집엔 들어왔어.
= 오울~ 능력 있네, 황윤석이. 예쁘냐? 예쁘냐?
= 야.
= 왜?
= 어째서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예쁘냐고 묻는 저의가 괘씸해서 좀 깔고 말했더니 오히려 저쪽에서 더 짜증을 낸다.
= 야, 너 그럼 그 만화가가 남자란 말이냐?
= 그렇다면?
= 너 바보냐. 왜 남자 집에 기어 들어가? 만화가 중에 천지빼까리가 여자 아냐!
= 웃기는 놈 보게. 남자건 여자건 무슨 상관이래?
= 야, 야. 작품도 다 음양의 조화가 필요한 거라고. 네가 이 높으신 엉아의 뜻을 어찌 알겠냐.
= 야, 이 사상 불순한 놈아. 너나 잘해, 너나. 지도 청년 실업 50만 중에 포함되는 놈 주제에.
= 글쓰겠다고 남자 집에 기어 들어간 놈보다 낫네요.
= 끊자, 화상.
= 야, 그러믄 혹시 싸인이라도, 좀.
= 놀고 있네. 끊는다, 김태형.
= 야, 야!
하여간 실 없는 놈. 전화를 끊고 이번엔 충전기 아닌 주머니에 넣고 다락에서 내려왔다. 작업실로 내려가는 뒷문을 열었다가 뭐 마실 거라도 가지고 갈까 싶어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팩에 든 포도쥬스를 꺼내 컵에 따르고 있는데 뒷문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올라온 모양이다. 부엌에 들어온 그가 날 보더니 '헙!'하는 소리와 함께 대단히 놀랐다. 대단히 놀란 그는 심지어 바닥에 주저 앉았다. 놀란 그의 소리와 행동 덕분에 오히려 놀란 내가 그에게 얼른 다가가 일으키려 하자, 그는 나라는 걸 알았을 텐데도 일으키려 댄 내 손에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저기.. 민규야?"
"아.. 미안."
"괜찮은 거야?"
"아.. 응. 나 때문에 놀랐지? 윤석 군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나도 참.."
드디어 평정을 찾은 건지 일어나라고 내민 손을 잡고 그가 일어났다.
"저녁 때 먹을 참치 해동시키려고 올라왔는데, 윤석 군은? 배고파? 뭐 간식 만들어 먹을까?"
아직 긴장 상태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닌지 그는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며 말도 정신 없이 늘어놓았다. 이러면 괜히 미안한 느낌인데..
"아니, 그냥 작업실 내려가려는데 마실 거나 가져가볼까 하고."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어? 굉장히 고맙네, 이거. 잘 마실게."
따라 놓은 쥬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는 듯 한숨을 휴- 하고 쉬더니 말을 이었다.
"같이 내려갈래? 근데 주의사항이 있어. 그림은 비밀이야!"
"알았어."
"가자."
그는 포도쥬스가 남은 컵을 그대로 들고 앞장을 섰다. 작업실로 내려가자 오늘은 그가-건축가들이 도면을 놓고 그릴 것 같이 생긴-작업대에 앉아서 안경을 꼈다.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수첩 앞에 있던 그림과 글에 대해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근데.."
"이름."
"응?"
"응. 이름."
"아, 민규야. 그 수첩 앞에 써있는 거 무슨 뜻이야?"
"아, 이제야 봤어? 어지간 하네. 별 얘기 아니야."
"뭔데?"
"그냥 노래 가사."
"무슨 뜻인데?"
"그냥 뭐 열심히 하라는 뜻이야."
연필을 쥔 그가 그다지 성의 있게 대답해주지 않자 살짝 기분이 상하는 것도 같았지만 작업 중인 그를 더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서 그를 보고 있으려니 표정이 좀 이상하다.
"그.. 림은 별로였어?"
"응?"
"아니, 그림에 대한 얘긴 없길래.. 혹시 허락도 안 맡고 그려서 싫었나 하고.."
일하면서 신경 별로 안 쓰는 척 하면서 묻고 있지만, 사실 그의 얼굴은 '나 꽤 신경쓰입니다.'였다.
"그럴 리가. 난 그냥 싫었다는 게 아니고 별 생각이 없었.. 그러니까 그림이 어쨌다는 게 아니고, 싫을 만한 게 없었단 얘기야. 고마웠어."
"응."
이유 없이 괜히 흥분해서는 또 이상한 말만 잔뜩 한 것 같아서 내 기분이 되려 언짢으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은 풀린 것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대화도 없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표정을 찡긋찡긋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안경을 거친 그의 눈이 시선을 겹쳐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끝. 저녁 먹자, 윤석 군."
문득 시계를 보니 저녁 먹기엔 약간 이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른 시간도 아니어서 그를 따라 올라갔다. 부엌에 간 그는 그의 카디건 색깔과 똑같은 앞치마를 또 두르고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했다. 오늘 저녁은 설거지만 부탁한다며 홈바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그는 재료를 준비해서는 홈바 안 쪽의 조금 더 높은 의자에 앉았다.
"내일부터는 아무래도 식단이 빈약하니까 미리 영양 보충하자고. 집에 있던 참치로 만든 주민규 표 초밥입니다."
홈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서-그가 시선이 좀 더 높았지만-그가 만들어주는 초밥을 먹는 방법까지 배우면서 먹었다.
"너도 먹어야지."
"응. 지금부터 먹을 거야. 이거 누가 만들었는지 되게 맛있다."
오물오물 씹으며 한 손은 허리에 손을 짚은 그가 나머지 한 손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빈 말이 아니라 진짜로 꽤-초밥 맛은 잘 모르지만-맛있었고 홈바 위의 둥근 갓을 쓴 전등 불빛에 진지한 그의 표정을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일부터는 내가 깨울 때 딱 일어나주세요. 씻을 동안은 아침 준비 부탁합니다."
"응. 수저하고 그릇 정도 더 꺼내면 되는 건데 뭐."
"걱정 안 할게. 근데 이거 진짜 맛있지 않아? 왜 감상이 없냐?"
"아, 맛있어. 진짜."
"어우, 재미없어. 생각 없을 때의 반만큼만 재밌어봐라."
"응?"
"아니야, 아니야. 많이 먹으라고."
"응."
이상해, 이상해.
분명 뭐라고 했는데..
또 무뇌 상태야.
# by | 2005/06/26 01:36 | =FlytotheSky= | 트랙백 | 덧글(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너무 잘 봤어요 + +그리고! 저 이글루에도 오셨더군뇨 + +
소설 써놓은걸 올릴려고 하는데 -_-) 저의 러블리 노트북을 동생이 망가트리는 불상사가 -_- 다행이 파일에는 지장이 없어서 조금만 고치면 소설을 + +) ㅎㅎ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 아아아 ㅇㅅ ㅠ 저두 민규군에가 맛있는거 얻어먹고싶습니다 ...
저 초밥 겁나 좋아하거든요 <- 또또 니얘기만 하냐 - ┏..
여튼 + + 결론은 소설을 겁나 잘 봤다는 소리입니다 <-
음 ㅇㅅㅇ/// 뭔가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 같닫고 해야하나 ?? 그런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소설감사합니다 + +
역시나 ,...독촉해도 되요 ?
'만화가...'는 뭔가 은근한 맛이 있어요. 위에 래인님 말처럼, 귓가에 소근거리는 식의 전개같아서 더 좋아요.(발그레<-)
이번에도 감상과 함께 독촉입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ㅡ